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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데스크

피란수도 부산 70년의 기억

◀앵커▶

6.25 한국전쟁이 올해로 70주년을 맞았습니다.

국군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부산은,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지역은 아니었지만
'피란수도'로서 정부 역할을 대신했는데요,

지금도 부산은 피란수도 당시의 흔적들을
곳곳에 품고 있습니다.

'피란수도 부산, 천 23일의 기록'을 주제로
당시의 생생한 기억을 더듬어보고
앞으로의 과제를 제시하는 기획보도를
마련했습니다.

현지호 기자입니다.

◀리포트▶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한민국 정부가 서울을 떠나 도착한 곳은
바로 부산이었습니다.

지금의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자리에
'임시수도 정부청사'가 세워졌습니다.

(S/U)"한국전쟁 당시 부산이 피란수도가 된 건
모두 2차례, 약 천여 일 정도입니다. 정부청사를 비롯해 대법원, 국회의사당 등 국가 주요 기관들이 이곳 박물관부터 대청로 일대를 따라 분포하고 있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로 돌아갔다
1·4 후퇴로 부산에 다시 오기까지 '1,023일'.

(CG)
이른바 '3부 권력기관' 근처엔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있었고,

부산항으로 이어지는 길목에는
상업과 외교, 교육·문화지구가 형성됐습니다.

국가의 수도로서의 모습을 온전히 갖춘 겁니다.(CG/)

국제시장과 부평시장은 유통을,
부산항 1부두는 무역을 담당하며
물류를 형성했고..

미국대사관이 있던 지금의 부산근대역사관은
치열한 전시 외교의 무대가 됐습니다.

한때 이화여대와 건국대 등
일부 대학까지 있었단 점에서,

부산이 피란수도가 된 건 '필연'이라고
역사가들은 해석합니다.

김기수 / 동아대 석당박물관장
"대전을 거쳐서 대구를 거쳐서 부산으로 오게 되잖아요. 그 과정 속에서 정치적인 면뿐 아니라 군사적인 면, 외교적인 면까지 다 고려를 해서 부산이란 곳을 선택한 것이죠."

전쟁 당시 부산지역 피란민은 약 40만 명,
직전 부산 인구에 맞먹는 수준입니다.

(CG)
이 가운데 7만여 명이
원도심 일대 산지와 경사지로 몰려들었고,
판잣집을 세워 주거지를 형성했습니다.

오늘날 산복도로가 만들어진 배경입니다.(CG/)

(S/U)"부산의 대표적인 피란민 거주지인 비석마을입니다. 마을 곳곳에서 이런 비석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한국전쟁 이전에는 일본인 공동묘지로 활용돼 왔던 걸 알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묘지와 소 검역시설 등지에
마구잡이로 쌓아올렸던 피란 거주지.

물 동냥을 하러 2시간을 걸어야만 했던
그때의 삶은 피란민들에게 전쟁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송필순 / 비석마을 거주
"보수동, 대신동 이런 곳에 가서 부잣집 문 앞에서 "물 한 동이 주세요. 물만 좀 주세요" 하면 부잣집 사람들은 물을 이렇게 주는데, (아이들이) 너무 많이 오면 주다가 들어가 버려요."

70년 전 새겨진 피란수도 1,023일의 흔적은
오늘의 부산을 만들어낸. 기억해야 할
역사입니다.

MBC NEWS 현지호입니다.

현지호
북구 / 강서 / 사상 / 사하

"모쪼록 부지런히 듣고 신중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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