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데스크

부마는 끝나지 않았다


◀ANC▶

40년 전 오늘, 부산시민들은
독재를 붕괴시켰습니다.

하지만 \′민주화의 봄\′은 오지 않았고,
오히려 광주5.18의 처참한 살육전으로 이어지죠

돌이켜보면,
87년에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는
79년 부마항쟁으로 앞당겨질수도 있었습니다.

79년 부산에서 시작한 민주화 여정이
87년 6월까지, 오랫동안 지체됐던 이유.

전두환 신군부의 어두운 역사때문입니다.

부마항쟁 기획보도...황재실 기잡니다.

◀VCR▶

79년 10월 24일 부산지검이 보고한
혜화여고 학생들의 서면집회 움직임.

동래고, 부산남고, 영남상고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준비한다, 그래서
등하교 시간에 작전을 전개했다는
공수특전여단의 상황일지입니다.

광주에서는 5개 고등학교 학생들이
부산시위에 동조하자는 서신이 전파됐습니다.

◀INT▶박유순
"와..가슴이 두근대고 박정희의 끝장이 부마로 인해서 이어지겠구나..."

전국확산을 눈여겨 본건
전두환 신군부였습니다.

19일부터 전국 대학가로 확산됐다,
처음부터 정권타도, 민주회복을 표방했고.
이례적으로 일반시민대중이 가세했다고
기록합니다.

전두환 신군부는 박정희의 강경진압 전략을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박정희의 친위대 역할을 했던 그들의
공통분모는 \′공수부대\′ 였습니다.

미국의 특수전학교를 졸업한
최초의 한국인들.

이들은, 계엄군 현장지휘관으로,
또 보안사령관으로 부마를 목격했습니다.

이들은 부마를 교훈삼아
\′초전박살\′을 목표로, 광주를 학살했습니다.

◀INT▶존 위컴
"전두환의 특수전 훈련경험은, 이것이(강경진압)이 사태를 신속하게 해결하는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마에서 실현된 \′대중시위\′ 방식은
광주로, 이후 87년 6월로 이어졌습니다.

◀INT▶박태균
"부마에서 처음 나온 대중시위..이후 광주, 6월에서 재연...부마항쟁은 대중시위의 기원.."

전두환정권은 6월 항쟁에서
계엄령을 준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INT▶
"전두환은 무력을 쓰고싶어했지만, 미국은 광주항쟁의 전국화를 두려워했다"

\′군사반란\′과 \′계엄령\′으로 점철된
정치군인들의 역사는,
또한번 계엄령을 검토했지만
국민을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MBC뉴스 황재실입니다.
◀END▶

황재실

뉴스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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